포기하시고 광명 찾으세요 - 뒷덕지의 뒷담화

뒷덕지

보편적 생각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합니다.

뒷담화’ 라고 누굴 비방하는 걸 기대했다면 그것은 오산.


 

 

  현실의 벽은 높고 두껍다. 딱히 바라는 건 없는 데도 벽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앞에 서 있다. 비켜달라는 말도, 좀 떨어져 달라는 말도 듣지 않는 딱딱한 벽. 이 상황이 싫어 눈에 불을 켜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다. 착각이 아닐지도 모르지. 현실의 벽은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나를 짓누르고 깔아뭉개 잠식시킨다. 

 

  도와주세요. 이런 말은 안 통한다. 벽에는 귀가 없고, 내 주변엔 아무도 없기에. 그것이 인생이란 거 뻔히 알고 있다. 가족과 친구는 그저 방관자일 뿐 손 내밀지 않는다. 인큐베이터에 갇힌 신생아를 바라보듯 그저 아쉬워하고, 그저 안타깝게만 바라볼 뿐. 그건 나도 마찬가지. 공허하게 들려오는 도와달란 소리에 반응하기엔 내 코가 석 자다. 

 

  선택지는 두 개. 벽을 격파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갈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다른 길을 갈 것인지. 나는 보통 전자를 선택하고 후자로 마음을 돌린다. 단어로 표현하자면 ‘포기’가 어울리지 않을까?

 


 

  나의 삶은 포기의 연속이었다. 커다란 프로젝트 앞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다가 GG를 쳤다. 그러고 나서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그럴 수 없다면, 심리적으로 선을 그었다. 자기방어를 위해 가시를 뱉어내고, 마음속으로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가 행해야 할 1인분을 하기 위해 노력할 뿐, 그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포기합니다. 아마 그 전에 주변 사람들을 다 알고 있었겠지. 

 

  누군가는 포기하는 것을 치졸하고 비겁하다고 한다. 책임감 없이 단순하게 행동한다면 그 말이 맞다. 치졸하며 비겁한 행동이다. 나는 그걸 ‘도망’이라고 부른다. 입 싹 닫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도망은 행위의 부재이다. 압박하는 그 무언가에 돌을 던지지도, 발길질도 하지 않는 것. 소리소문없이 그 자리를 뜨는 것. 나 또한 그런 행동은 천박하다 생각한다. 

 

 

 

 

 

  20대 초반, 극단에서 일을 하다 저렴하게 소비되는 나의 노동력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 가치가 진정한 나의 가치인지를 의심할 때가 있었다. 겨울날 출근을 준비하던 아침, 나는 모든 걸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에겐 군대라는 썩 의미 있는 퀘스트도 있었고, 복학이라는 애매하지만 돌아갈 자리도 있었다. 그리고 뼈를 때리던 나의 친구.

 

" 너는 한 것도 없는 데 포기라는 말이 어울릴까? "

 

  민망함이 밀려왔다. 내가 이룬 게 아무것도 없고, 나의 노동이 어떤 힘도 없는 상황에서 포기라니. 그건 도망이었다. 악착같이 버텨서 무언가를 이루든, 나의 가치판단에 오류가 있다고 담당자와 싸우든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 도망. 대충 변명을 대고 자리를 뜨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부끄러웠고, 반년을 더 다니다가 포기를 했다. 다행히 그때는 포기라는 단어가 꽤 어울렸다.

 

 

 

 

 

  포기는 생각보다 어렵다.포기와 ‘도망’은 결이 다르다. 나의 오만한 판단일지 몰라도, 포기는 선택이다. 도망이 뒤로 가는 것이라면 포기는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합리화가 아니다. 포기는 용기가 필요하기에,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쉽게 뱉을 수 없는 단어다. 포기를 떠올리는 사람에게는 무수한 고민이 한 겹씩 쌓여있다. 

 

  그러기에 내가 포기를 하는 과정은 더욱 복잡하고 섬세하다. 나에게 할당된 모든 숙제를 마무리하고, 주변에 피해가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한다. 그리고 하나씩 싹둑. 선들을 자른다. 누군가는 나에게 무책임하다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 변명할 생각은 없다. 그냥 손가락질과 상관없이 더욱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포기를 준비한다.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절망, 김수영  -

 

  절망이 절망을 반성하지 않듯. 포기는 포기를 반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포기하는 사람은 포기한 행동을 반성한다. 다른 길을 선택한 대가를 후회하기보단 겸허하게 받아드린다.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다음 단계를 맞이한다.

 


그러니 포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혹시 알까?

포기하며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

그 길에 광명이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