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플 땐 트로트

뒷덕지

 

 

힙합, 댄스, 락, 발라드도 좋지만 슬플 땐 What?

힙합, 댄스, 락, 발라드도 좋지만 슬플 땐 트로트.

 

에픽하이 - 트로트 中

 


 

“ 투표했니? ”

 

  엄마가 대뜸 나보고 투표를 했느냐 묻는다.

  아직 선거철이 한참 남았는데, 무슨 소리인고 하니 인기투표에서 임영웅이를 뽑았느냐는 것이다.

  임영웅이라…. 전에 일하던 극단 대표 이름이구먼. 그분이 뭘 하신다고?

 

“ 아니 그 임영웅이 아니라. 가수 임영웅! ”

 

 

  매주 목요일이면 우리 엄마는 낮잠을 잔다. 밤늦게 방영하는 ‘미스터 트롯' 덕분이다. 그냥 보면 자 버린다나 뭐라나. 작년에 진행됐던 ‘미스 트롯' 과 이름이 비슷하다. 그렇다 대국민 가수 송가인을 뽑아낸 TV조선의 ‘미스 트롯’ 남자 버전이다. 덕분에 매주 목요일마다 온 가족이 텔레비전을 틀고,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진또배기'며 ‘희망가'며 팔자에 있지도 않은 노래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사실 내가 트로트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어머나'와 ‘땡벌', ‘둥지' 정도는 노래방 장단을 통해 섭렵했고, 심수봉, 나훈아 정도야 익히 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나에게 트로트는 단순 짠짜라 뽕짝에 불과했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리믹스로 소비되는 양산형 노래에 그치지 않았다. 애초에 트로트라 하면 머릿속 연관검색어에 할머니, 노래교실, 가요 무대 이런 거밖에 없는 걸 어떡하라고.

 

  트로트? 분위기를 훅 띄울 신나는 노래. 근데 그런 노래는 기성곡에 이미 많거든. 그렇다고 이승환이나 싸이가 트로트 가수는 아니잖아. 우리 세대에 트로트라는 장르는 말 그대로 ‘입뺀’이라 느꼈다.

 

 

 

  근데 방송가가 난리다. 미스터 트롯은 이제 시청률 30%를 찍었고, 대망의 결승을 앞둔다. 타 방송사에선 우후죽순 트로트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 패턴 익숙하다. CJ의 나PD가 꽃할배 만들 때랑 똑같다) 4~50대는 물론이고 20·30세대들도 미스터 트롯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엄마·아빠 따라 봤던 사람들이 졸지에 앞다투며 콘서트 티켓을 예약한다. 10여 년 마다 트로트의 유행이 찾아온다고 하지만 이건 좀 대단하지 않나?

 

  확실한 건 미스터 트롯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화면 가득 큼직큼직한 자막 크기는 그들의 타겟층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근데 왜 타겟에 들지도 않은 내가 관심이 가는지. 결승 곡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왜 내가 궁금해하는지.

 

 

  미스터트롯은 내가 간과하고 있던 트로트 장르의 태고를 보여준다. 단순 뽕짝이 아닌 트로트의 장르성을 말이다. 트로트 속에 든 것이 사랑과 이별, 그리움과 애수임을 방송을 통해 알았다. 혹자는 트로트가 망해가는 과정 중 하나가 양산형 생산이라 말했다. 진입장벽이 낮은 탓에 쉽게 도전하고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이돌 음악도 마찬가지다. 메인 장르로서 히트를 하면 양산형 콘텐츠가 쏟아진다. 대중가요는 그런 식으로 변질하였다. 하지만 미스터 트롯은 오리지널을 잊은 사람들에게 정성 깃든 정석을 보여주며 참 맛을 짚는다. 누가 더 나은지를 비교하자는 게 아니다. 내가 모르고 있던 끈적하며 원초적인 장르가 입맛을 돋운 것이다.

 


 

가사를 좀 봐볼까.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풍진 : 세상에 일어나는 어지러운 일, 시련.)

 

채규엽 - 희망가 中

 


 

오늘도 가버린 당신의 생각에

눈물로 써내려간 얼룩진 일기장엔

다시 못 볼 그대 모습, 기다리는 사연.

 

설운도 - 보랏빛 엽서 中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

 

현철 - 봉선화 中

 

 

 

  은유가 참 예리하다. 여러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느껴진다. 필자는 이런 것에 쾌감을 느낀다. 가사 한 줄 한 줄에 화자가 느끼는 여러 감정이 녹아있다. 거기에 구성진 멜로디까지. 이리 좋은 노래들을 훤칠한 친구들이 진심 다해 불러주니 우리 엄마가 왜 재탕에 삼탕 방송까지 챙겨보는지 이해할 수밖에.

 

  역사가 참으로 깊은 장르이니 명곡이 많은 게 당연하다. 그 깊은 역사에 몸을 던지는 저 어린 청년들이 그저 대단하다.

 

 

(위 모든 사진의 출처는 미스터트롯 공식 사이트의 스크린 샷 입니다.)